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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번지는 도시의 질병 ‹빈집›
김동인 / 김연희 / 장일호
사진
신선영 / 윤무영
이명익 / 조남진

2019년 한국은 양극단에서 부동산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집이 없다.” 그리고 “사람이 없다.”

국토의 88%를 차지하는 지방도시에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빈집이 넘친다. 빈집은 지금 이 순간 도시가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이며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위협의 경고다.

우리는 이 불균형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시사IN>은 지난 5월부터 4개월 간 전국의 빈집을 찾아다니며 한국형 빈집이 처해 있는 문제점과 그 원인을 분석했다.

한국보다 앞서 빈집 문제를 겪은 일본, 미국, 독일 사례도 취재했다.

대한민국 익산시

들판에 레일이 깔리자 사람이 모였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갈라지는 구간에서 도시가 태어났다. 전라북도 익산시는 한때 광주와 전주에 이어 ‘호남 제3의 도시’로 불린 호남의 입구다. 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했다. 지방도시 어디에나 하나쯤은 있을 법한 ‘젊음의 거리’도 이곳에 들어섰다.

전라북도 익산시 구도심 '젊음의거리' 일대. 빈 점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중앙동 번화가가 ‘과거형’이 된 것은 1990년대부터다. 시 동쪽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중앙동 일대는 구도심이 되었다. 신도시에 들어선 아파트는 인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2019년, 중앙동 일대는 폐허다. 예식장, 호텔, 사우나 따위가 거대한 박물관처럼 과거를 박제하고 있었다. 280m 남짓한 익산문화예술의거리에는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 인위적인 정비 구역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부서진 유리창과 버려진 침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빈집으로 무성한 도시를 우리는 익산역에서 걸어서 5분이면 만난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서울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2019년 대한민국은 ‘집이 없다’와 ‘사람이 없다’가 공존한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실거주자를 위한 주택이 부족하지만, 지방도시에서는 사람이 사라진 빈집이 점점 늘고 있다.

2017년 전라남도 나주시 공가율은 20%에 육박한다. 빈집 문제가 심각하다고 알려진 일본의 평균 공가율 13.5%(2018년)를 뛰어넘는다.

7월13일 나주를 찾았다. 영산포 지역(이창동·영산동)에서 빈집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창동의 공가율은 26.48%, 영산동의 공가율은 19.48%다.

대다수 빈집에는 폐가구나 생활쓰레기 등이 널브러져 있다.

9월28일에는 충남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 지역을 찾았다. 과거 충남방적 공장이 있던 곳이다. 공장은 18년 전인 2001년 문을 닫았다. 사람이 떠나고, 유흥가는 폐가로 바뀌었다. 간혹 빈집을 개조해 외국인 노동자 몇몇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이 동네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졌다는 아파트로 향했다. 입주한지 2년이 다 되었지만, 아파트 상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동네 한 편에는 10층 정도 지어올리다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단지도 있었다.

120만 가구가 비었다.

이런 빈집은 전국에 얼마나 흩어져 있는 걸까? <시사IN>은 등록센서스 자료인 2017년 인구주택총조사를 심층 분석했다. 분석 기준은 ‘준공 후 1년 이상 비어 있는 주택’으로 삼았다. 이번 분석에는 미분양 아파트가 포함된 반면, 오피스텔은 제외되었다. ‘빈집 및 소규모 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이하 빈집 특례법)’상 미분양 아파트는 ‘빈집 집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분석에서는 미분양 아파트도 빈집의 주요 원인이자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오피스텔은 애초에 데이터가 없다. 주택법상 주택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피스텔 빈집까지 포함하면 지방도시 빈집 비율은 이번 분석 결과보다 더 많으리라 추정된다.

전국 빈집은 119만9306가구 수준이다. 전체 가구수 대비 빈집 비율인 공가율은 7.18%다. 그리 높은 수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평균에 불과하다. 빈집은 생기는 곳에서 또 생긴다. 중소규모 지방도시에서다.

아래 전국 시군구별 빈집 데이터를 살펴보자. 색이 진할수록 빈집 비율이 높은 도시다. 강원 평창군(23.07%), 경북 청도군(20.51%), 강원 양양군(20.03%) 등 ‘군’ 단위 소도시가 우선 눈에 띈다.

지도를 터치하면 지역별 정보를 지도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국 시군구 공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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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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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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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북적이는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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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허전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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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남 광양시(16.05%), 전북 김제시(14.72%), 경북 영천시(14.69%), 경북 상주시(13.16%) 등 지역 거점도시들도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다. 반면 수도권은 상대적으로 청정지역이다. 빈집 위험은 국토의 88%를 차지하는 비수도권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에 위치한 한 장기 방치 건축물
빈집은 왜 생기는가?

지방도시에서 발생하는 빈집은 수요와 공급 원리에 따라 발생한다. 공급과잉이 첫 번째 이유다.

지방도시에 대규모 아파트가 공급되지만 이내 미분양이 발생한다. 미분양 주택은 가격 조정을 거쳐 결국 언젠가는 해결된다. 도시 내 풍선효과다. 장기적으로 주민들은 천천히, 좀 더 나은 주거환경을 찾아 단계적으로 옮겨간다. 결국 남는 것은 오래된 주거환경이다. 대개 지방도시에서는 구도심 지역이 ‘최후의 빈집’으로 남게 된다.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에 방치된 한 폐가. 빈집 가운데에는 이처럼 재활용이 불가능한 집도 많다.

지방에서도 인구가 많고 중요 거점지역으로 꼽혔던 네 군데(익산·나주·김천·거제)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전북 익산시는 구도심인 중앙동(23.93%)과 평화동(26.41%)의 공가율이 높게 나타난다. 빈집 밀집지역을 다른 지역이 감싸는 형태다. 전남 나주시 역시 나주역 인근 구도심인 송월동(21.85%)에서 빈집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전북 익산시와 전남 나주시의 행정동별 공가율(2017년)
0%
5%
10%
15%
20%
25% 이상
전라북도 익산시
1
영등2동
2
어양동
3
영등1동
4
남중동
5
마동
6
인화동
7
중앙동
8
모현동
9
송학동
10
평화동
전라남도 나주시
1
금남동
2
영강동
3
송월동
4
빛가람동
전북 익산시와 전남 나주시의 행정동별 공가율(2017년)
전라북도 익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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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다 만 흉물 아파트’도 공급과잉이 빚어낸 풍경이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에는 290여 세대 규모 군서월곡아파트가 14년째 방치되어 있다. 2000년 착공을 시작한 이 아파트는 2005년 11월 당시 사업자가 콘크리트 골조만 세운 채 사업을 중단했다. 이후 이 아파트는 인근 주민들의 ‘골칫덩이 흉물’ 취급을 받았다.

애초 시장성이 없는 사업이었다. 사업이 중단된 2005년 군서면 인구는 4098명에 불과했다. 290여 가구가 들어설 만큼 수요층이 넉넉하지 않았다. 2019년 9월 기준 군서면 인구는 3253명에 불과하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예산군 신례원 창소리에도 비슷한 ‘공사 중단 장기 방치 건축물’이 있다. 방치된 흉물 아파트는 빈집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서울에서 서류로는 확인할 수 없는 지방도시의 실상이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만큼 지자체가 임의로 해결하기도 어렵다.

젊은 인구가 사라진 곳에 빈집이 남는다

빈집의 또 다른 원인은 ‘수요’에서 발생한다. 이게 더 핵심이다.

주택 수요는 인구 구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젊은 인구가 사라져서다. 이번에는 경상북도 김천시로 가보자.

경북 김천시와 경남 거제시의 행정동별 공가율(2017년)
0%
5%
10%
15%
20%
25% 이상
경상북도 김천시
1
자산동
2
평화남산동
3
지좌동
4
율곡동
경상남도 거제시
1
장평동
2
고현동
3
옥포2동
4
옥포1동
5
능포동
6
장승포동
7
수양동
경북 김천시와 경남 거제시의 행정동별 공가율(2017년)
경상북도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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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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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남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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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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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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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상
경상남도 거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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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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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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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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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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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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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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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상

김천시 구도심 모암동 일대에는 월세 광고 전단지가 골목 입구를 채우고 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10만~20만원이라도 받겠다는 광고가 경쟁적으로 내걸렸다. 4㎞ 바깥에 김천혁신도시가 위용을 자랑했지만, 구도심은 오히려 빈집으로 허덕이고 있다.

경상북도 김천시 모암동 일대. 이 지역에는 세입자를 찾지 못한 주택이 헐값에 임대되고 있었다.

신도시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것도 아니다. 구도심인 대신동(10.11%), 대곡동(11.31%), 지좌동(15.14%)의 빈집 비율도 높지만 혁신도시 지역인 율곡동(29.36%)의 빈집 비율 역시 전국 최고 수준이다. 사정이 비슷한 전남 나주시도 혁신도시 지구인 빛가람동의 빈집 비율이 23.62%로 집계됐다.

산업 위기로 대규모 일자리가 사라지는 현장에서도 빈집은 빠른 속도로 번져간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경남 거제시 빈집 데이터에는 조선업의 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거제시의 빈집 비율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지역은 장승포동(29.9%)과 옥포1동(27.3%), 장평동(19.47%)이다. 모두 ‘조선소 동네’다. 장승포동과 옥포1동은 대우조선해양 조선소 인근, 장평동은 삼성중공업 조선소 인근 지역이다.

전북 군산시도 빈집 비율이 14.01%에 달한다. 군산시 소룡동과 미성동의 공가율은 각각 22.69%, 22.98%다. 두 동네는 공업단지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배후 주택 지역이다. 1990년대에 미성동에 지어진 한 아파트는 43㎡짜리 집 한 채가 2500만원 전후에 거래되고 있었다. 군산시는 구도심 공동화와 산업 쇠퇴로 인한 빈집 문제를 동시에 겪는 도시다. 군산시 구도심 지역인 중앙동(19.97%), 흥남동(22.99%)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빈집에도 유형이 있다.

빈집이라고 해서 다 같은 형태는 아니다. 한국형 빈집은 법률에 따라 여러 층위로 나뉜다.

먼저 지방 농촌형 빈집이 있다. 농가에 살던 고연령층 주민이 사망하거나 이주하면서 발생한다. 농촌 지방지자체는 이 집을 귀농 인구에게 알선하는 사업을 벌인다. 농어촌정비법에 관련 조항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막상 이들 귀농하는 사람들은 고쳐 쓰기보다 새로 짓기를 원한다. 과거에 지은 집을 수선하는 것보다 최신 공법으로 짓는 게 더 경제성이 낫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에 있는 한 버려진 건물. 이곳 인구는 2011년 3470명에서 2018년 2831명으로 줄었다.

두 번째는 지방 중소도시형 빈집이다. 인구 10만~20만명 규모 도시들이다. 이런 중소도시는 두 가지 축으로 살펴봐야 한다. 구도심, 그리고 ‘읍’이다.

1931년 처음 등장한 ‘읍’은 한국 지방행정체계에서 중요한 거점지역으로 꼽혔다. 국어교과서에 흔히 등장한 풍경이 ‘읍내 나들이’다. 그만큼 과거에는 상업 중심지이자 교통 요충지였다. 그러나 오늘날 읍은 상업 중간거점으로서 역할이 퇴색했다. 생필품은 물론 식재료도 배달시키는 세상에서, 소매유통업은 자연스럽게 몰락했다. 교통수단 발달로 읍내 의원 대신 대도시 종합병원을 찾는다.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이 대표적이다. 만경강 하류 호남평야에 자리한 만경읍은 익산과 군산, 김제 한가운데 위치해 호남평야와 새만금 인근 요충지로 꼽혔다. 오늘날 이곳에서 빈집은 흔하디흔한 일상 풍경이 되었다.

만경읍 두내산로 남쪽 구간(만경리)에는 버려진 집과 점포가 어지러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 주민은 “나이 드신 분들이 아프니까 더 이상 여기에 계시지 못한다. 돌아가신 분들도 있지만, 아직 기력이 남더라도 도시 요양원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집이 텅 비어 있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한때 농촌의 거점지역이었던 '읍'은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고령화는 '읍' 지역을 해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서울 근처에도 빈집이 생길까?

마지막 유형은 대도시형 빈집이다.

대도시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재개발 열풍이 차갑게 식은 뒤, 해당 지역에는 빈집 밀집지역이 남는다. 인천 미추홀구(옛 남구) 주안동과 숭의동 일대가 대표적이다. 숭의동 일대는 2006년 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2012년 해제되면서 자산가치만 믿고 집을 구입한 집주인들이 집을 버려두는 경우가 발생했다. 부산이나 서울도 마찬가지다. 서울시 노원구에서 전국 최초로 빈집 관리 조례가 제정된 것도 이 지역 재개발이 무산되면서였다.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 지역 일대. 사진 오른쪽 아파트는 2017년 11월에 입주를 시작했지만 아직 분양과 임대를 모집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는 짓다 만 '흉물 아파트'가 남아 있다.

최근에는 ‘수도권 신도시형 빈집’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서울 통근 접근성이 약한 1·2기 신도시 노후 아파트에서 빈집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LH토지주택연구원 이삼수 박사는 “아직 한국에서는 현실화되기 어려운 빈집 형태이지만 이미 일본 도쿄 인근 위성도시에서는 발생하고 있는 문제다. 인구가 도쿄 내부로 더 쏠리면서 외곽이 비어가는 형태다. 수년 후 한국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빈집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늘어나는 현상은 구체적으로 도시에 어떤 문제를 불러올까. 내가 내 집을 비워둔다는 건데, 과연 남들이 뭐라 할 일일까?

빈집이 지역사회에 문제가 되는 건, 빈집 자체에 전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나뿐인 빈집도, 차츰 그 수가 늘어가다 보면 동네 전체의 자산가치를 떨어뜨린다. 인근 가정에서 쓰레기를 투기하는 사례가 발생하며, 때때로 탈선이나 범죄에 악용되기도 한다. 생각지 못한 악취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다시 동네를 떠난다. 다시 빈집이 생기고, 도시는 슬럼으로 변한다. 악순환이다.

빈집은 사유지다. 집을 비우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소유주의 재산권 행사에 속한다. 빈집이 동네 주민들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기 전까지는 지자체 차원에서 철거를 권고하거나 해결을 강제할 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다. 행정적인 해결이 미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슬럼화는 가속화되고, 빈집은 번져나간다.

빈집은 어느새 슬며시 생겨나지만, 사실 그 집과 도시는 오래 전부터 문제를 내포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해결 역시 느리다. 집이든 토지든, 모든 것에는 ‘돈’이 들기 때문이다.

길은 없을까? 전문가들도, 지역 관계자들도 빈집 문제는 낯설어했다. 특히 과거에 ‘잘 나갔던’ 도시일수록 더 그랬다. 빈집은 후기산업사회의 사회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먼저 빈집문제를 겪었고, 나름 해결책을 고심했던 나라들을 찾았다. 미리 말하자면, 어디에도 한국을 위한 정답은 없었다. 모든 시도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디테일에 주목했다. 실패는 실패 나름대로 시사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본 오사카 • 교토
어느 오사카 사람의 아침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무심코 <요미우리 신문>을 넘기던 고야마 다카테루 씨가 가위를 들고 기사 하나를 정성껏 오려냈다. 기사는 새롭게 등록유형문화재에 지정된 건물 세 곳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중 한 곳인 ‘데라니시케 아베노 나가야(寺西家 阿倍野 長屋)’가 고야마 씨의 눈길을 끌었다. 1932년 지어진 이 건물이 연립주택으로는 최초로 문화재에 지정됐다는 내용이었다. 고야마 씨 동네, 일본 오사카시 아베노구 쇼와초(昭和町) 지역에 있는 건물이었다.

2003년 9월21일 오전, 고야마 씨는 오려낸 기사를 들고 당장 그곳을 찾아갔다. “보는 순간 ‘이런 나가야(長屋)는 이 마을에 얼마든지 있잖아’ 싶었어요. 저를 비롯해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치를 몰랐지만 마을이 그야말로 문화재투성이였던 셈이죠.”

나가야는 2층짜리 서민형 목조주택으로 3~4가구가 나란히 이어져 있으면서 출입문은 각각 갖되, 외벽은 공유하는 형태로 지어진 집이다.

쇼와초 지역은 오사카 도심에서 지하철로 15분 거리에 있는 오래된 마을이다. 100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교외 농촌지역이었지만 쇼와 시대(1926~1989) 오사카의 팽창하는 인구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최초로 토지구획정비 사업이 시행된 곳이기도 하다.

성장하는 도시에 발맞춰 좁은 골목마다 비슷한 모양의 나가야가 단기간 동안 한꺼번에 들어섰다. 나가야는 2층짜리 서민형 목조주택으로 3~4가구가 나란히 이어져 있으면서 출입문은 각각 갖되, 외벽은 공유하는 형태로 지어진 집이다. 당시로서는 신식 건축이었다.

버려진 나가야, 되찾은 나가야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쇼와 시대가 막을 내리고 헤이세이 시대(1989~2019)가 출범하면서 장기 불황이 시작됐다. 저출산·고령화도 심화되었다. 현 일본 인구는 약 1억2000만 명이다. 그러나 50년 뒤에는 8000만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90년 전 개교한 쇼와초의 한 초등학교 졸업생은 30년 전 2000여 명이었지만 현재는 300여 명으로 70% 가까이 줄었다.

1970년대 주택법이 느슨하게 개정되며 노후 건물이 점차 수요를 잃었다. 손이 많이 가는 목조주택 대신 콘크리트 주택이 있는 도심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늘었다. 쇼와초 지역에도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빈집이 생겨났다. 무더기로 지어진 나가야가 골칫거리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오사카시의 빈집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꽤 심각한 수준이다. 공가율이 17.2%로 일본 평균(13.5%)을 상회한다. 집을 철거해 나대지로 두는 것보다 그냥 빈집으로 방치하는 게 재산세를 훨씬 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사카시 빈집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꽤 심각한 수준이다. 공가율이 17.2%로 일본 평균(13.5%)을 상회한다

지역 토박이인 고야마 씨의 고민도 깊어졌다. 부동산 업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문자답하는 날이 늘어갔다. 나가야는 골칫거리인 동시에 빈집 문제 해결의 실마리이기도 했다.

“집이 이렇게 남아도는데 신축은 계속되고 있죠.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면 엑셀을 밟으면서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는 거죠.”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됐지만 빈집 상태로 있었던 한 집을 리노베이션한 뒤, 고야마 씨는 본격적으로 빈집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이디어로 식당과 카페로 변신한 데라니시케가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한적한 주택가 골목마다 갤러리·카페·식당부터 꽃집, 서점, 옷 가게, 요가학원, 디자인 상점 등이 점처럼 박혀있었다.

고야마 씨는 “빈집에 지원하는 정부 보조금은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이다”라고 단언했다. 자력으로 승부하기보다 보조금에 기댄 채 사업을 시작했다가 몇 년 뒤 지원이 끊기면 사업도 망하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민간 차원에서 ‘작은 대책’을 여럿 만들어 쌓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 동네 가게는 우리가 지킨다

2018년 7월 기준 쇼와초 지역 내 빈집을 재생해 운영 중인 상점은 모두 46곳이다. 골목마다 같은 업종의 가게가 겹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치한다. 작은 공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업종도 다양하다. 갤러리·카페·식당부터 꽃집, 서점, 옷가게, 요가학원, 디자인 상점 등이 한적한 주택가 골목마다 점처럼 박혀 있다.

아베노구 지역에서 만난 상점들은 끊어진 역사를 잇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만큼 마을의 표정은 다양해졌다.

고야마 씨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역 내 연구자·건축가·조경업체 등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마을의 가치를 높이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단체가 2013년 4월 출범한 ‘바이 로컬(buy local)’이다. ‘지역 내 가게는 동네 주민이 지킨다’라는 생활방식을 제안하는 일종의 운동단체다.

지역 주민이 동네에 어떤 상점이 있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46개 상점을 소개하는 지도가 실린 소식지를 만들고, 그중 14개 식당은 따로 레시피를 수집해 요리책을 만들어 배포했다. 매년 ‘바이 로컬의 날’을 정해서 플리마켓을 열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아베노구에 사는 주민 약 10만8000명 중 4000명이 플리마켓을 다녀갔다.

린도노하나는 10년 넘게 흉물이었던 나가야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지 않고 집 형태를 거의 그대로 살렸다.

고야마 씨가 초창기 입점시킨 12년 차 카페&바 ‘린도노하나(りんどうの花)’는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10년 넘게 흉물이었던 나가야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지 않고 집 형태를 거의 그대로 살렸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나무 바닥 위에 다다미가 깔려 있다. 좌식 탁자는 네 개뿐이다. 네 명이 쪼르르 앉을 수 있는 바는 주방 가까이 위치했다. 메뉴는 그때그때 식재료에 따라 한두 가지만 내놓는다. 앉은자리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자연스레 감탄사가 나왔다. 건물과 울타리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정원(坪庭·쓰보니와)은 빛과 바람을 품은 채 움직이는 액자가 되었다. 상점 주인 오와다 마사코 씨는 부산에서 했다는 눈썹 문신을 자랑하며 한국에서 온 손님을 환대했다.

쇼와초 지역에서 만난 상점은 린도노하나처럼 끊어진 역사를 잇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었다. 지하철역 부근에도 프랜차이즈 매장 한 곳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만큼 마을 표정은 다양해졌다.

오사카시 아베노구에서 마루준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코야마씨는 15년 전부터 빈집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왔다. ‘KAZE MACHI ROMAN’과 카페 ‘텐트’ 등이 입점한 나가야는 코야마 씨의 속을 가장 많이 썩힌 건물이다.
낡은 목조건물이 마법처럼 되살아나다

마법은 오사카에서 기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교토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나루카와 게이치로 교토시 주택공급공사 사업추진과 과장은 8년 전 ‘운명’을 만났다. 일본 국토교통성 산하기구에서 일하는 나루카와 씨는 빈집 문제와 관련된 연구를 주로 해왔다. 자연스레 현장에서 빈집을 접촉할 일도 잦았다. 그의 관심이 직접 살아보는 일로 옮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루카와씨의 교마치야는 나무 바닥부터 계단 손잡이까지 최대한 1932년 지어진 당시 모습과 재료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1950년 건축기준법이 만들어지기 전 지어진 목조주택 마치야(町屋)는 상가와 주거를 결합한 일종의 주상복합이다. 그중에서도 과거 1200년간 수도였던 교토에서 만들어진 마치야는 특별히 교마치야(京町家)라고 부른다. 교토시 공가율은 14%로 높은 편이지만, 일본 전역은 물론 해외에서도 관광객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며 정책적으로 교마치야를 보전하고 보급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1997년 10월 당시 교토시는 교마치야 보전을 위한 공익재단 ‘교토시 경관·마을 만들기 센터’를 설립했다. 운영비는 여전히 시에서 90% 가까이 부담하지만 교마치야 재생과 관련된 사업은 대부분 개인이나 단체의 기부를 통한 펀딩으로 진행된다. 센터는 교마치야를 전수조사해 개별 주택 이력을 관리하고, 이를 통해 추후 예상되는 문제를 사전에 파악해 멸실을 방지하는 일을 한다.

잘 보존된 교마치야일수록 가치도 매우 높은 편이다. 오래전 지어진 교마치야는 내진 설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오늘 날 빈집으로 남겨진 경우가 많았다. 8년 전인 2011년 나루카와 씨가 선택한 집도 비슷했다.

1932년 6월 지어진 집은 3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를 맞이한 건 족히 30㎝ 이상 쌓인 낙엽이었다.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푹신한 낙엽을 헤치고 걷는 동안 평생 가장 많은 벌레를 만났다. 후다닥 몸을 숨기는 족제비 가족에게는 미안할 정도였다. 서류만 없었지 낙엽과 벌레와 족제비가 주인인 집이었다.

그와 동행했던 도편수(우두머리 목수)의 의견은 달랐다. 노후한 겉모습과 달리 건축 당시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고가의 재료가 사용됐으며, 구조 자체가 큰 손상 없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목수 이름과 건축일자 등이 적혀 있는 상량(上樑)을 발견한 순간 나루카와 씨는 집 구입을 결정했다. 상량에는 과거 교토 제일이라 불리던 도편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빛과 바람이 집 안팎을 드나들도록 계절에 따라 창틀과 문틀을 바꿔단다.

리모델링을 하기까지 과정이 간단치는 않았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짜 맞추는 전통 방식으로 리모델링했다. 일부 전문가밖에 할 수 없는 방식이라 비싼 값을 치렀다. 물을 사용하는 주방과 화장실은 현대식으로 고칠 수밖에 없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옛것’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본격적인 공사에 앞서 4개월은 매일같이 청소만 했다. 청소를 하는 동안 집 구석구석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구입에서 입주까지 1년 가까이 걸렸다. 조명 하나부터 나무 바닥과 계단 손잡이, 얇은 나무를 세로로 세워 방과 창문을 막는 격자(格子)까지 지어진 당시 모습과 재료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애썼다.

“신축은 빈집을 만드는 일”

살면 살수록 교마치야에는 숫자나 말로 잴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나루카와 씨는 생각한다. 교마치야는 1년 열두 달 중 4월과 5월 단 두 달을 제외하면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해야 하는 ‘가혹한’ 집이다.

교토시내에 10년 이상 버려져 있던 마치야 두 채를 중정을 중심으로 연결해 하나의 공간으로 만든 ‘이또노와’는 청년 창업시설이다.

그래도 봄과 초여름 사이 두 달의 쾌적함을 경험하고 나면 추위와 더위는 견딜 만하다. “냉난방이 완벽한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라고 그가 말했다. 여름이 오면 다다미방의 창호를 떼고 발을 걸었다. 빛과 바람이 집 안팎을 드나들도록 창틀과 문틀을 바꿔 다는 동안 매일 조금씩 집과 친해졌다. 그는 사람이 옷을 갈아입듯 집도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깃든 역사를 조곤조곤 설명하던 나루카와 씨가 목소리를 높인 순간은 딱 한 번이었다. “신축을 하는 건 빈집을 만드는 일이다”라고 말할 때였다.

“요즘 일본 사람들은 주택을 ‘산다’고 얘기해요. 그런 감각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빈집 문제 해결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옛날에는 집 을 ‘짓는다’고 했거든요. 옛사람들은 집 하나를 제대로 짓기 위해 산을 먼저 사서 나무를 키운다고 했어요. 애초부터 제대로 짓지 않은 집이 결국 빈집을 만들고 암처럼 도시를 좀먹는 것 같아요.”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이곳은 폐허였다.

유리창은 모조리 깨지고 벽돌 골격만 남았다. 32만5000㎡(약 9만8000평) 규모의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의 파커드 자동차 생산 공장은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공장 내부는 마구잡이로 갈겨쓴 그래피티와 각종 잔해가 엉켜 있었다. 무너진 옥상에는 잡목이 돋아났다.

1958년 가동을 중단한 파커드 자동차 공장

폭격을 당한 건 아니다. 다만 방치됐을 뿐이다.

1903년부터 파커드모터 사의 고급 차량 기종을 생산하며 디트로이트의 번영을 이끌었던 공장은 1958년 가동을 중단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수많은 공장이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911년 ‘모델 T’를 생산하기 시작한 포드 사의 하이랜드파크 공장도 1974년 문을 닫았다. 컨베이어벨트를 최초로 도입해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던 영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텅 빈 건 공장만이 아니다. 파커드 공장 근처 주택가에도 버려진 집이 적지 않았다. 2013년 디트로이트 전역에 있는 빈집은 7만8000채에 이른다. 시청과 디트로이트 토지은행에서 방치된 부동산을 철거하고 있다. 토지은행 제도는 미국의 여러 주에서 시행 중인데, 디트로이트 토지은행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다. 그럼에도 수십 년간 쌓여온 빈집은 여전히 도시를 뒤덮고 있다.

러스트벨트의 쇠락한 영광

디트로이트에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 3대 자동차 회사인 포드, GM, 크라이슬러의 본사가 몰려 있어서 ‘모터시티’라는 별칭을 얻은 디트로이트는 1950년대 미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던 도시였다. 185만명이 이 도시에 터를 잡았다.

이제는 ‘러스트벨트(녹슨 지대)’라 불리게 된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 일대 공업지대 도시들도 기울기 시작했다. 가장 큰 도시였던 디트로이트의 후퇴는 그만큼 더 극적이었다. 2010년 기준 디트로이트 인구는 한창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71만 명 수준이다.

디트로이트는 성장을 멈춘 도시가 경로를 변경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디트로이트에서 빈집이 사회문제로 인식된 건 1980년대부터였지만 도시는 확장적인 부동산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투자를 하면 경기가 살아나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라는 익숙한 믿음 때문이었다

믿음과 달리 도시의 쇠퇴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빈집은 늘어나고, 시 당국의 재정은 악화됐다. 오랫동안 지속된 지역 경기침체에 세계 금융위기 여파까지 겹치자 2013년 디트로이트는연방파산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한다. 부채 규모는 미국 지자체 가운데 사상 최대인 180억 달러(약 19조3000억원)였다.

1974년 포드 공장이 문을 닫자 주변으로 빈집이 늘어났다.
빈집은 어떻게 동네를 망가뜨리나

세수 감소로 치안 유지가 어려운 도시에서 빈집은 범죄를 키우는 토양이 되었다.

본래 쓰임새를 잃은 건물은 방화와 쓰레기 무단 투기의 대상이 되었고, 마약 판매상들의 거래 장소로 이용되었다. 디트로이트의 강력범죄율은 미국 평균의 5배까지 치솟았다. 디트로이트는 4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디트로이트 시내의 폐쇄된 빌딩 외벽에 가림막이 쳐져있다.

역설적이게도 도시가 나락으로 떨어진 2013년은 변화를 향한 출발점이 되었다. 2013년 9월 오바마 행정부는 디트로이트 도시 재생을 위해 연방정부 예산 3억 달러(약 3590억원)를 편성한다.

디트로이트는 이 예산을 기반으로 도시에 퍼져 있는 빈집 전수조사에 나섰다. 디트로이트의 빈집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모두가 알았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모터시티 매핑(이하 MCM)’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사를 위해 디트로이트의 그림자를 제거한다는 뜻인 ‘디트로이트 블라이트 리무벌 태스크포스(이하 디트로이트 TF)’가 꾸려졌다. 공공기관과 민간 영역을 망라해 각계각층의 단체가 도시를 되살리기 위해 모였다.

러브랜드 테크놀로지의 CEO인 제리 파펜도르 씨도 그중 한 명이다. 러브랜드 테크놀로지는 지오그래픽 데이터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회적 기업이다. 파펜도르 씨는 빈집 전수조사에 쓰인 애플리케이션 ‘블렉스팅’을 개발했다.

주민들이 직접 나서 DB를 모으다

빈집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파악하는 일은 예상외로 까다롭다. 주로 수도나 전기 사용, 우편물 배송 등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빈집을 찾아내는데, 정확도가 떨어진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람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건물 상태를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다. MCM 프로젝트는 바로 이런 방식의 조사였다.

2013년 11월부터 조사원 200명과 그보다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10주간 디트로이트 전역을 돌아다니며 38만 필지를 전수조사했다. 조사원들은 블렉스팅 앱을 이용해 건물이 비어 있는지, 훼손 정도는 어떠한지, 방화 피해는 없는지, 소유주는 있는지 등 부동산 상태를 15가지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기록했다. 해당 부동산의 사진을 찍어서 함께 올렸다. 블렉스팅 앱에 입력된 정보는 곧바로 ‘모터시티 매핑’ 사이트에 업로드되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가 모여 디트로이트 빈집 지도가 완성됐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빈집은 총 7만8000채로 집계됐다. 버려져 폐허가 된 부동산은 4만 채, 폐허가 될 위험이 높은 빈집은 3만8000채였다. 모터시티 매핑 사이트(motorcitymapping.org)에 접속하면 누구든지 디트로이트에 있는 빈집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DB축적 이후 디트로이트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철거 작업을 추진하는 ‘디트로이트 데몰리션 프로그램’, 빈집을 수리한 뒤 되파는 ‘리햅&레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이 모든 사업 시행의 기반인 MCM 조사는 빈집 문제를 풀어가는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디트로이트 토지은행은 방치된 주택을 수리해 되파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러브랜드 테크놀로지는 이 프로젝트 참여 이후 매핑(부동산 정보 지도) 작업을 미국 전역으로 확대했다. 파펜도르 씨는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 가장 풍부한 빈집 정보를 가진 도시”라며 이렇게 말했다. “빈집의 위치를 소유권, 주택압류, 세금납부 등 다른 데이터와 함께 보지 못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디트로이트는 일단 그 그 첫 단추를 채운 셈이다.

“도시를 축소하자”

미국이든 한국이든 ‘도시가 예전처럼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여간해서 벌어지지 않는다. 디트로이트에서 370㎞ 떨어진 오하이오주 영스타운은 그 일을 해낸 도시다. 스마트 축소(Smart Decline)이라는 도시재생 방식은 영스타운을 도시계획 분야에서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영스타운 맥거피 지역의 전경. 빈집이 철거된 곳이 잔디밭으로 바뀌었다.

디트로이트처럼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영스타운은 철강산업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1977년 대형 철강기업인 영스타운 시트&튜브가 문을 닫자 인구 유출에 시달리게 된다. 17만명이 거주하던 도시는 인구의 60%가량을 잃었다. 마지막 인구조사가 이루어진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영스타운 인구는 6만5000명이다.

도심은 황폐해지고 버려진 주택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갔다. 2000년 영스타운의 주택 공가율은 13.4%로 미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과거에 갇혀 녹슬어가던 도시는 2000년대 초반 전환을 꾀하게 된다. 영스타운 주립대학과 영스타운시가 주축이 돼 수립한 ‘영스타운 2010 플랜’은 새로운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봤다.

4가지 기본 원칙이 담겼다. ‘영스타운이 작은 도시라는 것을 받아들이자, 새로운 지역경제하에서 영스타운의 역할을 정의하자, 영스타운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삶의 질을 향상하자, 행동으로 실행하자.’ 이 원칙의 중심에는 더 작지만 더 나은 도시가 될 수 있다는 스마트 축소 개념이 놓였다.

“성장과 번영을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성장과 번영을 약속하지 않는 정책에 주민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영스타운 2010 플랜이 발표된 2002년 12월16일 공청회에 많은 주민이 몰렸다. 200명만 모이면 성공적이라고 여겼던 공청회에 1400명이 참석해 새로운 비전에 귀를 기울였다. 이날 참석자 가운데 100명 이상이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주민들은 도시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는 이후로도 계획을 추진하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커뮤니티 개발 소장으로 영스타운 2010 플랜을 주도한 제이 윌리엄 씨는 그 성과에 힘입어 2005년 영스타운 시장으로 선출됐다.

영스타운 마을개발공사(이하 YNDC)는 영스타운 2010 플랜을 수행하기 위해 2009년 설립됐다. 민간 비영리기구지만 정부로부터 운영 기금을 지원받는다. 영스타운 2010 플랜은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므로 구체적인 계획이 뒤따라야 했다. YNDC에서 지역 플래너인 헤트릭 씨가 맡은 업무가 바로 이행 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2014년 YNDC는 영스타운에 있는 13개 마을을 선정해 세부적인 정비계획을 발표했다. 훼손 정도가 심한 마을이 선정되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비교적 주거 여건이 괜찮은 지역이 선별됐다. “우리가 정비 계획을 세운 13개 마을은 인구가 꽤 밀집돼 있고 부동산 거래가 아직 죽지 않은 곳입니다. 빈집이 하나 생기면 마을 전체로 번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에요. 옆집에 살던 사람들까지 떠나버리는 거죠. 그래서 상태가 심각한 곳보다는, 빈집이 있지만 그 수가 비교적 적은 지역에 개입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2008년 약 5000채였던 영스타운의 빈집 수는 올해 상반기 1300채 수준으로 감소했다.

러스트벨트에서 빈집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영스타운은 지난해 인근에 있는 GM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으며 일자리 1000여 개를 추가로 잃었다.

스마트 축소라는 개념이 크게 각광받았지만 버려진 건물과 공터를 정비하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디트로이트에는 주택을 압류당해 집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도시를 거듭나게 하려는 수많은 노력과, 빈집과 싸워온 수십 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은 뚜렷하지 않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적어도 이들 도시에서 경기가 살아나기만을 바라며 빈집을 방치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독일 작센주 라이프치히
통일이 도시에 남긴 상처

베를린에서 뮌헨까지 이어진 9번 도로는 독일 동부의 척추와 같다. 베를린에서 출발해 이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표지판에 두 도시의 이름이 등장한다. 라이프치히(Leipzig)와 데사우로슬라우(Dessau-Roßlau). 모두 분단국가 시절 사회주의 정부하에서 발전했고, 똑같이 통일 직후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 작센주 라이프치히 전경. 통일을 앞당긴 도시이지만 통일 이후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었다.

2010년대 들어 두 도시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렸다. 한 곳은 인구가 유입되며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 손꼽히는 반면, 다른 한 곳은 여전히 인구가 줄고 있다. 2000년대 두 도시 모두 가장 큰 숙제는 바로 빈집이었다.

독일식 빈집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통일이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1990년부터 2008년까지 옛 동독 지역 주민 138만여 명이 서독 지역으로 향했다.

라이프치히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한 그륀더차이트 양식 건물이 많다. 통일 직후 사람들은 이런 건물을 떠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건물이 재생을 기다리고 있다.

작센주 라이프치히시는 통일의 방아쇠를 당긴 지역이다. 1989년 10월9일 ‘월요 시위’가 통일을 앞당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촉발한 통일은 이후 20년간 도시를 매우 위축시켰다. 1987년 55만여 명이던 라이프치히 인구는 2001년 49만여 명으로 감소했다.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인구 75만여 명이던 도시 곳곳에 빈집이 늘었다.

라이프치히시에는 이른바 ‘그륀더차이트(Gründerzeit)’ 양식 건물이 많다. 라이프치히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20세기 초 유행한 이 건축 양식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건물은 속속 비기 시작했다.

도심에서 4㎞ 바깥에 위치한 주거 밀집지역 플라크비츠(Plagwitz)는 그륀더차이트 건물이 대다수인 대표적인 슬럼이었다. 빈 건물 유리창은 누군가 던진 돌로 깨졌고, 입구는 나무판자로 막아두었다.

플라크비츠의 반전

플라크비츠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라이프치히 도시재생 사업이 본격화된 10여 년 전부터다. 플라크비츠 역 인근 ‘카를하이네 거리(Karl-Heine-Straße)’가 재생의 핵심 축이 되었다.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빈집 정비가 필수였다. 이때 빈집 정비에 앞장선 이들은 시청이나 연방정부 관계자가 아닌 지역 주민들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단체를 설립하고 빈집 소유주와 저렴한 임차료를 원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사업을 벌였다. 소유주에게 저렴한 가격에 임대를 내줄 것을 설득했다. 지방정부도 주민의 자생적인 활동을 지원하며 빈집 정비에 나섰다. 재생이 어려운 집은 철거를 유도했다. 이때 활용한 주요 정책 수단이 주택보유세였다. 소유세를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빈집 정비를 유도했다.

카를하이네 거리는 최근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힙스터 지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과거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 아티스트를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고, 옛 극장을 개조한 영화관 등이 자리잡았다.

문화 예술은 빈집 문제 해결과 도시 재생의 치트키였다. 라이프치히 시청 관계자들은 문화예술 공간과 아티스트, 그리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재생의 핵심 인물들이라고 설명한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빈집에 들어와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라고 말한다.

아티스트가 도시를 구한다

인구 21만여 명이 살고 있는 튀링겐주 에르푸르트(Erfurt)시 역시 문화예술 분야에서 자생적인 생태계가 발전하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에르푸르트시 관계자는 “젊은 인구를 잡아둘 자생적인 활로를 찾느냐가 도시의 미래를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공간이 과거 역 인근 창고를 재활용한 추크하펜(Der Zughafen, 철도 항구라는 의미)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를 처음 추진한 건 에르푸르트시 출신 독일 가수 클뤼조(Clueso)와 그의 매니저 안디 벨스코프다. 에르푸르트 역 인근에 버려진 창고 건물에서 게릴라 라디오 방송국을 차리고, 지역 예술가들을 끌어 모았다. 클뤼조와 벨스코프는 이들을 규합하고 버려진 공간을 재조직했다.

축구장 1.5배에 달하는 옛 에르푸르트 역 창고 건물에 모인 아티스트들은 양조장, 공연장, 작업실, 전시장으로 개조했다. 에르푸르트 시청 역시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아예 역 인근 재개발 계획(ICE-CITY)에 추크하펜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기는 내용을 포함했다.

도시재생이 불러온 부작용, 젠트리피케이션

라이프치히나 에르푸르트는 도시 쇠퇴-거버넌스 구축-도시재생-인구 유입이라는 과정을 거친 끝에 활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 순환이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건 아니다. 몇 년 전까지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인 젠트리피케이션도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카를하이네 거리 한편에 위치한 한 중고품 매장(Second Hand Store)은 플라크비츠 지역이 최근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매장은 시리아 이주민 출신이던 지역 주민이 운영했는데, 어느 날 가게가 사라지고 대신 여성 의류 매장이 들어섰다. 단골 가게를 잃은 동네 토박이 주민들은 새 가게 주인에게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고, 계속된 문의에 지친 새 주인이 아예 가게 입구에 “(원래 있던 주민은) 우리가 내쫓은 게 아니다”라는 팻말을 걸어두어야 했다. 오랫동안 지역민과 관계를 맺었던 상업시설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분위기는 이 지역 주택시장에서도 감지된다. 플라크비츠 인근에는 집을 개조해 에어비앤비(민박 플랫폼)에 내놓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임차료를 받는 것보다 숙박료를 받는 게 더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민박을 위해 세입자를 내모는 경우도 생겼다. 임차료도 급격하게 오르는 추세다. 주변 지역과의 위화감을 고려해 시청이 대규모 자본 투자를 막고 있지만, 도시재생의 주축이었던 주민들 처지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자본의 압력’이 생겼다.

작은 도시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라이프치히나 에르푸르트 사례는 빈집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옛 동독 지역 전반을 보면 도시재생의 효과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2018년 독일 도시별 빈집 비율을 분석한 아래 그림을 살펴보자. 지도에서 옛 동독 지역은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면 여전히 빈집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2016년 독일 도시별 빈집 비율 (%)
2016년 독일 도시별 빈집 비율 (%)
2.5% 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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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BBS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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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BBSR, 2018

작센안할트주 데사우로슬라우(이하 데사우)시는 여전히 인구 유출에 허덕이는 중소도시를 대표한다. 이곳은 통일 전까지만 해도 인구 10만명 규모를 유지해왔다. 통일 이후 젊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 2018년 8만1237명 수준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전체 인구의 20%가량이 고향을 떠난 셈이다.

데사우는 라이프치히나 베를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결정적 차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연령대다. 도심에서 전동 휠체어나 지팡이에 의존한 고령 인구가 눈에 띄게 많았다. 도시를 가득 메운 건축물도 과거 동독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데사우 시내에 있는 한 주택가. 가운데 공터가 빈집이 있던 자리다.

동독을 상징하는 건축물 플라텐바우(Plattenbau)가 많다. 한국식 아파트와 비슷한 형태에 집단 거주하는 방식이다.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독일식 모더니즘 건축은 옛 동독 사회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주도하에 조립식 콘크리트 빌딩 건축으로 발전했다. 한국식 아파트의 먼 친척뻘인 셈이다.

통일 후 플라텐바우는 빠르게 비어갔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마저 플라텐바우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데사우에서는 건물 전체를 폐쇄하거나 리모델링하는 플라텐바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주택 협동조합(Genossenschaft)’이 시 정부가 보유했던 플라텐바우를 관리하고 정비하며 임대하고 있다. 협동조합이 공급 체계를 정비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요 측면에서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의 물결이 워낙 거세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 독일인들은 구 동독식 아파트인 플라텐바우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데사우에서도 통째로 비어 있는 플라텐바우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빈집이 생긴 곳에 정치적 극단주의가 피어나다

일부 옛 동독 지역 중소도시는 외부 인구 유입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편, 최근에는 독일로 넘어온 난민을 적극 받아들였다. 2015년부터 옛 동독 지역 도시들 사이에서 비슷한 방안이 논의됐다. 난민을 받아들이면 인구가 늘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로부터 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다. 이 같은 난민 수용 정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도시 중 하나가 인구 10만명 규모인 브란덴부르크주 콧부스다.

하지만 콧부스의 난민 수용 정책은 지역 주민의 반발로 중단되었다. 인구 24만여 명 규모인 작센주 켐니츠도 비슷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들 지역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독일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유독 빈집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 선전했다.

빈집 전문가인 만프레드 쿤 박사(라이프니츠 연구소 부원장)는 빈집으로 대표되는 도시 불균형이 정치적 극단주의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쿤 박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극단주의를 등장하게 만들었다. 정치적 극단주의는 주로 옛 동독 중에서도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라고 말했다. 난민 수용에 대한 반발과 AfD의 선전, 그리고 인구 감소와 빈집 문제 모두 서로 연관지어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라이프치히나 에르푸르트 같은 도시재생 성공 사례는 한국 빈집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지방정부가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가 도시재생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독일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어렵다. 독일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딜레마는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역시 젊은 인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대도시와 지방 소도시 사이에 점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유럽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유럽 지역 소도시 재생 사업에 재정지원을 펼치는 것도 ‘대도시 쏠림 현상’에 위기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한국
무엇이 과연 빈집일까

빈집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처음 대두된 것은 2010년대 들어서다. 빈집의 정의부터 논란이었다. 허물어지고 버려진 폐가만 빈집일까? 별장처럼 사람이 가끔 드나드는 집은 빈집이라고 볼 수 있을까?

2017년 ‘빈집 및 소규모 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이하 빈집 특례법)’이 제정되고 나서야 합의된 기준이 생겨났다. “자치단체장이 거주 또는 사용 여부를 확인한 날부터 1년 이상 아무도 거주 또는 사용하지 아니하는 주택”, 즉 지자체장이 집이 비어 있다는 것을 1년 동안 확인한 후에야 공인되는 개념이다.

빈집 특례법이 제정되면서 빈집 해결 및 정비를 위한 법률적인 틀은 마련할 수 있게 됐다. 빈집 특례법 아래서 빈집 해결 주체는 어디까지나 지방자치단체장이다.

지방도시의 빈집 해결 주체는 지방자치단체장이다. 그러나 빈약한 지방 재정이 발목을 붙잡는다.

시장이나 군수, 구청장 등이 빈집 여부를 판정하고 대책을 수립해야 하는데, 이는 인력과 예산을 쏟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지자체의 역량이 다 뛰어난 것도 아니다. 법은 근거만 제공할 뿐 사실상 빈집 대응 정책은 각 지자체의 행정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빈집 문제 해결의 또 다른 난제는 재정 문제다. 지자체 재정은 열악하다. 철거나 리모델링도 돈이 든다. 독일 같은 경우 중소도시에서 얼마든지 연방정부나 유럽연합의 펀딩을 받아올 수 있지만, 한국에서 지방도시가 빈집 문제 해결을 위해 펀딩을 받는 방법은 마땅치 않다.

빈집을 철거하는 게 더 비싼 한국

빈집 소유주의 동의와 협조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소유주의 빈집 해결을 지자체가 유도할 만한 정책적 수단도 제한적이다. 가령 주택 보유세가 많이 드는 독일에서는 소유주가 집을 철거하기를 먼저 원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은 반대다.

오히려 집을 철거하는 게 더 돈이 드는 경우도 많다. 집을 철거하면 원래 집이 있던 땅은 ‘주택’에서 ‘토지’로 바뀌는데, 땅에 대한 공시지가가 단독주택 공시가격보다 높을 경우 더 많은 돈을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제 혜택만으로는 자발적인 빈집 해결을 유도하기 어려운 구조다.

익산시 구도심 일부 지역은 최근 재개발에 돌입했다. 그러나 대규모 재개발만으로 구도심 전반에 퍼진 빈집 문제를 해결하긴 어렵다.

세부적인 지원정책도 중요하지만, 결국 빈집 문제는 한국의 지방 도시 정책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질문하게 한다.

선거 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최첨단 하이테크 시티’ ‘성장하고 역동하는 도시’를 내세우지만, 지방도시의 현실은 정치인의 비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빈집은 도시계획의 전면 수정이라는 큰 과제를 부여한다. 그동안의 성장 중심 도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서울형 도시재생을 지방에서 쓸 수 없는 이유

성장과 개발 중심 정책 대신 도시재생이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방 중소도시를 위한 도시재생 정책은 이제 막 태동한 단계다. 역설적이게도 지방도시는 너나 할 것 없이 서울을 닮아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졌고, 그 해결책인 도시재생 사업 방식까지 서울을 닮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빈집 문제는 결국 시름시름 앓고 있는 지방도시가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서울형 도시재생의 핵심 동력은 젊은 인구다. 젊은 인구는 서울이 확보한 자산이다.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을 만한 젊은 층이 수도권에는 많지만, 지방도시는 희소하다.

이 지점에서 최근 지방도시의 도시정비 및 도시재생 사업은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마을 커뮤니티를 만들어도 이를 유지시킬 만한 자발적 인력이 모자란다. 일부 지방도시가 ‘도시의 과거’를 관광 상품화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방식으로 과거를 재현하고 있다. ‘추억의 거리’를 만들고, 근대 문화유산을 지정하며, 맛집 골목을 홍보한다. 하지만 외부 여행객을 끌어올 만한 과거를 가진 도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차라리 도시를 응축시키면 해결되지 않을까? 미국 영스타운 같은 ‘축소도시’가 제기된다. 축소도시란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주민들을 밀도 높게 재배치하는 도시정책이다. 도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자체를 인위적으로 줄여서 행정력 낭비를 없애고 주거환경도 개선하자는 아이디어다.

그러나 반대도 만만찮다. 축소도시를 시행했던 영스타운에서도 이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었다. 축소도시 개념축소도시의 핵심은 사람을 이주시키는 일인데, 여전히 부동산 가치 상승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걸림돌이다. 지자체가 선뜻 도시를 줄이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어렵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개발 공약 경쟁이 몰아칠 경우 축소도시 논의는 물론 도시재생 논의도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빈집이 초래한 새로운 논쟁

빈집으로 대표되는 지방 인구문제는 국토 균형발전에 대한 새로운 논쟁도 야기한다. 현실론에 입각한 일부는 빈집이 발생하는 현실에서 아예 서울 밀집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서울에 기회와 자원이 많으니 차라리 서울의 밀도를 더 높이자는 주장이다.

나름 근거도 있다.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누를 게 아니라 공공임대가 중심이 되어 서울 가까이에 더 높은 건물을 세워 올리자는 주장이다. 정부가 핵심 과제로 꼽고 있는 지방 균형발전과는 정반대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수도권 대항축’을 만들자고 말하는 쪽도 있다. 여당 내 영남권 인사들이 특히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쏟는다. 집중화 현상은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부산·울산·경남을 중심으로 자원을 집중시켜 수도권의 인구 흡수를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이 전략 역시 나머지 지역의 빈집 발생을 ‘어쩔 수 없는 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빈집은 일종의 ‘징후’다. 빈집에는 해당 도시의 인구구성 문제, 일자리와 복지의 문제, 그리고 고령화 문제가 담겨 있다. 빈집은 가벼운 감기 증세와 닮았다. 단순 감기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 복잡한 호흡기 계통이나 내분비 계통에 이상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도시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지 판단하는 1차 척도인 셈이다.

지방도시형 빈집은 지방의 허약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 사회의 수도권 집중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다. 인구를 지역에 잡아두는 이른바 ‘인구 댐 정책’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빈집이라는 신호로 위기를 보낸 한국 지방도시는 다시 활로를 찾을 수 있을까. 지난 70여 년간 성장과 개발을 외치며 발전해온 한국 도시정책에 빈집은 전에 없던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 주간지 시사IN

빈집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시사IN> 632호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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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번지는 도시의 질병 빈집>
이 기사를 함께 만드신 분들
김동인 / 김연희 / 장일호
사진
신선영 / 윤무영 / 이명익 / 조남진
영상 촬영
김민수 / 신선영 / 윤무영 / 이명익 / 조남진
영상 제작
김민수 / 이효정
데이터 분석
신수현
디자인 • 구현
스튜디오 벨크로